31 03 2010

베푸는 삶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0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에스더 9:22

언젠가 누구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그 말이 내맘에 뿌리를 내리면서 평소에 생각해 오던 나의 생활 철학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읍니다. 그분이 한 말은 바로,”새 옷을 사 입으면 몇일이 행복하고, 새 차를 사면 몇 달이 행복하고, 새 집을 사면 몇 년이 행복할 수있다. 그러나 베푸는 삶을 살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었읍니다.  이 말은 바로  성경, 사도행전 20장 35절, 주님의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느니라.”의 진실성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베푸는 삶이 평생 행복의 비결이다.”는 말은 이 세상의 교훈이 아니라 불변의 성경, 진리의 말씀입니다.

요즘 세간에 불교의 한 지도자이신 법정스님의 타계에 즈음하여 그분의 생전의 가르침에 많은 감동을 받고있읍니다. 특히 “무소유”란 그분의 정신에 대해 많이 회자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원리가 그것과는 너무 동 떨어진 삶들을 살고 있기에 더욱 뚜렷하게 우리들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일 겁니다.  그 분의 글 중에, “부자가 되려하지 말고 베푸는 자가 되도록 하라.”는 글 귀는 베품의 삶의 행복을 역시 말씀하고 있읍니다.

기회가 있어 어떤 분과 이러한 주제로 대화를 하는 중, 그분이 저에게 말씀하기를, “아니 가진 것도 없는데 무얼 가지고 베푸느냐?” 고 다소 마땅치 않은 듯한 반응을 해 왔읍니다. “아니 그 스님은 혼자 사셨던 분이기에 그렇게 말 할 수 있을른지 모르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살 수 없지요.”라고 계속 말을 이었읍니다.

저는 최근에 마야 안젤루의 ”나는 멋지고 아름답다.”의 글 중에 ‘베푸는 사람’이란 짧막한 시를 읽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읍니다. 그곳에서 베푼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았읍니다. 즉 그것은 상냥한 미소 한번, 따뜻한 말 한마디, 앉았던 자리에서 옆으로 조금만 비켜 앉는 것,… 등이라고 했읍니다. 내 손에 가진 돈이 없어도 옆으로 조금 비켜 앉으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있는 자리에  앉을을 수 있고, 어느 건물로 들어 갈때 내가 연 출입문을 조금만 붙잡고 있으면 뒷 사람이 편안히 들어 올 수있는 것등, 즉 누군가에게 배려하는 마음이 바로 베푸는 삶이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인생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가요? 아니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있지 않을가요?  사실 우리가 이런 마음만 있으면 정말 우리가 물질로도 남을 도와야 할 처지가 된다면 우리의 손에 그 물질로 하나님이 쥐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실천되지 못하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 권고하고 있읍니다. 저는 요즘 구약 성경 에스더서를 읽는 중, 인생 역전의 극적인 대목을 읽고 감동을 받습니다. 유대 백성이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에 당시 페르시아의 총독 하만의 모함으로 유대 백성들이 모두 사로 잡혀 죽어야 하는 처절한 상황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도리어 하만과 그의 가족들이 처절한 처형을 받는 그러한 참사가 일어 났읍니다.

그결과로 유대인들은 화를 면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복수할 수 있는 권한을  왕으로 부터 허락 받아 반대로 된 이야기입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고 서로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명절, 부림절을 지키도록 했는 데 이때 한가지 더 추가한 사항은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남다르게 하나님의 그 배려의 마음을 깊히 생각하고 감사함을 느꼈읍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가난한 사람들이 늘 자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그 힘든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도 항상있어야 하지 않겠읍니까?  에베소서 2장10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소위 마음 좋은 사람들, 또는 착하고 신앙적인 소수의 사람들 만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태어 날 때 부터 운명적으로 남을 돕는 것으로 태어났다는 것입 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 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운명(destiny) 은 무엇인가” 저의 운명은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은 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Destiny란 영어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처음 부분에는 그저 “운명, 숙명,또는 필연”이라고 되어있지만 좀 더 자세히 사전의 아랫 부분으로 내려가면서  찾아보면, “하늘의 뜻” 이란 말도 있는데, 신앙인으로 보면 이것은 막연한 사람들의 살아갈 운명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Design해 주신 착한 일을 하는것으로 해석 할 수있는데, 특별히 우리들의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획하신 우리가 해야 할 착한 일을 사는 것이 신앙적 운명입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저의 이러한 운명을 조금이나마 살아온 것을 감사하면서 앞으로 정말 그분이 저에게 가장 귀하게 디자인 해 주신 그 운명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

27 02 2010

이 세상에서 보람있게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람을 세우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교회도 세우고, 학교도, 많은 자선기관을 세우는 것이 어찌 중요 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읍니까? 사람을 세우는 것은 예수님께서 3년동안 심혈을 기우려 소수의 제자들을 세우심으로 그의 사역중에 중요하셨던 것을 일부러 인용할  필요가 없이, 사람들을 세우는 일은 영원한 일에 투자하는 것이므로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 입니다. 그러면 이일에 관련하여 어떻게 제자들을 삼을까 에 대하여 지난번의 글에 이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저는 지난번 로스 엔젤레스를 방문하여 귀한 목사님들 몇분들과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읍니다. 놀라운 것은 모든 분들이 주님을 위하여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았읍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삶의 자센지 몰랐읍니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세상에의 것에 전 삶을 걸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편안한 삶을 영위할까, 좀더 높은 명예를 얻을까 하는것인데 이분들은 어떻게 전도를 잘 할 수있을까, 어떻게 사역을 해야 효과적일까 하는 것이었 읍니 다.  그 중에 한 목사님은 말하기를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아주 잘 어울니는 탈래트가 있어 누구와도 쉽게 다가 가서 관계를 잘 한다고 했읍니다. 그랬더니 옆에 앉아있던 동료 목사님들도 그의 말에 동의를 하며 그렇다고 했읍니다. 이 얼마나 사역하는데 특히 교회를 개척하는 데 귀한 은사인지 모릅니다. 전도를 하는 데,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또는 교회를 시작하는 데 사람들과 잘 섞이어 교제하고 관계를 원만히 할 수있느다는 것은 강력한 도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자리를 했던 이들이 부러워 했었읍니다.

       우리들은 계속하여 관심있게, 그러면 어떻게 그 건강한 관계를 잘 형성 할 수있을가에 대하여 토론의 광장을 마련했었읍니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풍부한 화제로 효과적인 관계 형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 서로 생각이 같이 되어지는 중요한 포인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읍니다.

       즉 관계가 잘 형성되려면 두 상대방이 서로의 마음이 서로를 향하여 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쌍방이 서로의 마음 속에 가로 막고 있는 그 무엇이 없어 질 때 서로의 사이가 가까와 집니다. 마음의 열려짐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할 때 마음들이 열려 질 까요. 첮째로 우리 목회자들이 먼저 상대방에 대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죠.  돕고저 하는 진지한 마음이 바탕으로 된채 사람들을 접근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야기 할 수있는 분위기를 주의 깊게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먼저 말을 잘 하는 사람들에 게는 들어주면 됩니다. 그의 대화속에서 그의 필요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분들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분들에게는 우리가 격고 있는 힘들은 일들을 조금 나누거나, 우리들의 약점을 과감히 말하는 것이 그들의 귀를 열고 그리고 입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절대로 자신의 자랑을 하거나 상대방을 비하는 그 어떤것을 표현하게 되면 대화는 단절되고야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열려진 입을 통해 주의 깊게 들으며 또 적절한 질문도 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캐취하여 노트해 두어야 합니다. 나중에 그들의 필요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것을 채워 줄 성의와 실제로 도와 드릴 때 그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됩니다.

       두번째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사람 됨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것 같아도 절대로 쉬운것이 아닙니다.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더욱 여려운 함정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의 하는 일이 늘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이어서 사람들을 보는 대로 설교해 주고, 교정해 주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하는 지를 우리는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도 길게 설교를 하거나 판단하는 식으로 하면 교인들이 마음을 닫는 것을 모르는 지요. 상대방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할때는 충고나 교정을 해 주려고 하지 말고 우선 그가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과거 가 있다는 것과 그러니 이해 해 주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것도 지적해 주거나 충고를 준다면 그의 사람 됨됨이를  믿어주는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읍니다. 그러나 저의 말을 좀 들어보세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의 사사 건건 다 판단하며 칭찬하며 징계를 하시나요? 하나님께선 우리의 부족한 면, 하나님의 수준에 맞지 않는 우리들의 실수를 다 지적해 처리하셨다면 우리중 누구도 지금의 이 자리에 존해할 수 없읍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우해 주십니다. 예수님 말씀하시 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여 준 것(만큼)을 행한다.”고 하셨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듣는 대로 우리의 수준에 않맞는 다고 다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도 하시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 닫아버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묵과하고 말것인가. 그건 아니고 특히 하나님께서 어떤 분에 대하여 강하게, 분명하게 당신에게 그에게 말하라는 것이 있으면, 조심스러이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지적하면 절대로 않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보실 때 얼마나 많은 것을 그냥 지나쳐 버리셨는 데 우리가 예수님이나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사람들 입니까?

       아무리 악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Talent가 있으니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찾아 책임을 지고 교정해 나가도록 우리들은 옆에서 도와 주면 그것으로 우리의 할 일은 다하는  것입니다. 또 그가 고치지 않고 계속 잘못된 일을 한다면 자기가 책임을 하나님께 지고 갈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사람들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믿어줄 때 그들이 우리로 부터 위로를 받을 것이고 위로를 받을 때 그들의 마음이 우리게로 열리게 됩니다. 그럴때 그들과 우리들의 관계가 건강하게 되어 그들을 주님의 제자로 인도하는 귀한 출발점이자 성장과정으로 들어가게 도와 주는 것이됩니다. 이것이 사람을 세우는 귀한 사역이 됩니다





제자들의 교회

1 11 2009

10월29일 에 Mike Huchubee(전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쟁자)의  Leadership Development의 쎄미나가 Severn Run에 있는  한 미국 교회에 있어서 참석을 하였는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Drew가 나와서 인사를 하는 말 중에 아직  기억에 남는 말이 있어서 그것을 나눔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여러분 잘 오셨읍니다. 이 건물이 (사실 그 건물은 아름다운 수준급을 넘어선 것이었음)우리  교회가 아님니다. 단지 Severn Run교회가 쓰는 모임의 장소인  건물일 뿐입니다.  에또 화장실은 저쪽에 있고 식당은 또 저쪽에 있읍니다. ……” 이렇게 말을 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고 말을 한다. 우리가 그 말을 알고있다. 그런데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 아니 목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듣기는 처음이다.    이 말로 인해 다시한 번 교회의 참뜻이 상기된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목사님의 제자의 책에 자신이 어떻게 제자들을 양육했는지 여러 말을 언급한 것중에 이런 말을 한다. “오늘날의 전통적인 교회는 사교의 모임과 같다.”(P. 183) 그 사교의 모임과 같은 교회에서 사람들을 빼어 내 제자를 삼는 것을 하도록 권한다.  오르티즈목사는 교인들 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께서 하신일은 12명의 제자를 삼는 일을 제일먼저 시작했읍니다. 나는 이 사교모임과 같은 교회를 계속 섬기겠지만 새로 지하교회를 시작하겠읍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집에서 집사 몇을 빼어내어 주중에 그들에게 제자의 삶을 살았다.

 

그 모임에서 오르티즈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라 한 형제로 된 것이다. 그는 그 모임에서 더 이상 존경받는 Reverend가 아니라 한 평신도 형제였다. 평신도로 그 모임에 있는사람들에게 그의 삶을 바치며 그들을 섬겼다. 그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기도 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일, 아니 그들이 오르티즈형제의 집에서 자기도 하고, 그도 그들의 집에 자기도 하며 서로 돕고 의지하는 하나의 식구 관계가 되었다.

 

오르티즈목사가 섬기는 교회의 교인들이 약 반년 정도가 지났을 때 이 가정교회와 같은 제자모임에 주목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 제자 형제들의 영적 성장과  신실하고 참된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르티즈는 그 제자 모임에서 함께 한 사람들에게 교회에 가서 사람들을 빼어 내어 똑같이 제자를 삼으라고 권고 했단다.  그후 그 교회는 1500명이 넘는 형제가족 교회로 변하게 되었다.  각 가정에서 모임을 Sunday에 가지기에 사실 교회의 건물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건물을 없앨 것은 없이 숙소가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중요한 거처로 쓰거나 공간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요긴하게 쓰게 되었다.

이렇게 오르티즈의  교회에서 사람들을 빼어내어 제자를 삼았던 인도자 중에 한 매케닉인 가초란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하루에 9시간의  근무를 하고 집에 돌아와 제자 삼는 일을 꾸준이 하여 얼마후에는 300명의 제자들로 교제를 하게 된것이었다.  Sunday 예배는 그때 그때 지도자인 가초의 인도대로 여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각종 직업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이 열심이 사역자들이 되어 수백명씩의 제자 구룹이 되어 1500명의 제자 가족교회 로 일정한 주일 모임 예배로 드리지 않으며 사역에 임하고 있다.

 

그 제자들은 반드시 오르티즈 교회에 교인으로 다시 올 필요가 없이 계속 제자 삼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떤 때는 그 제자구룹의 지도자의 지도 안내로 Sunday에는 심지어 천주교에 까지 가서 미사에 참석하며, 여러 종류의 교회에 주일예배에 참석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  주안점이 무엇인가 말이다. 그것은 교회의 크기를 늘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증가시키는 것이 목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르티즈 목사님에 남아있던 교우들로 제자로 성장하여 나중에는 수천명의 예수님의 제자로 되었고 계속 제자삼는 교회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르티즈 목사님이 먼저 자기 집에서 제자 삼는 일을 시작하여 그 모임에서 제자로 된 이들로 하여금 (그들은 각종 직업 전선에서 뛰는 평신도들) 또 나가 자기 교인들을 빼 내어 제자를 삼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중에  자기 집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 개인적으로 만나 그들을 섬기며 예수님의 삶을 보고 함께영적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제자로 변해가는 사역에 치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르티즈 목사가 말하는 제자도 법칙 1, 2를 살펴보도록 하자:

제자도 제1법칙;”복종없는 양육은 있을 수 없다.” 이다. 사교모임의 회원들은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고 하며, 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히13:17)고 말씀하신다. 목사들은 먼저 자신의 자녀들에게 말해야 한다. 복종하지 않으면 권면해야 한다. 그래도 듣지 않을때는 모든 권위로 책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아이가 어긋날지도 모른다.

제자도제2 법칙; “복종없이는 복종이 있을 수없다.”는 것이다. 자기 제자에게 명령하는 사람도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  스승은 제자를 책망한다. 다른 사람을 제어할  권세를 갖기 원한다 면 다른 사람의 통제아래로 들어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법칙이다.





자라지 않는 아이

29 09 2009

한 가정에 아이가 없어 오랫동안 기다리다 귀여운 아기가 태어나니 온 가족들이 얼마나 그 갓난 아이를 귀여워 하고 기뻐하는지 이를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그 아이가 점점 자라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이제 쉬운 말도  배워 가게 되니 더욱 그 부모들은 이를 데 없이 즐거워 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이 아기가 자라지를 않는다. 우유만 먹기를 고집하고 밥이나 다른 굳은 음식은 도통 입에 대질 않으며 말도 쉬운말 그저 몇마디만 할 뿐 언어가 발달하지 못하고 그냥  갓난 어린애 시늉만 한다. 그리하여 이 가정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어느 새 인가 무겁고 어두운 슬픔의 분위기로 변하게된것이다.

       나는 여기서 지난번 블로그에 이어 제자의 삶을 연속적으로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특히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목사님의 “제자입니까”란 책의 ‘자라지 않는 아이’란 테마를 가지고 제자도를 한번 짚어보며 우리가 어떻게 제자로 연결될가를 다루고자 한다.

       오르티즈목사님은 오래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교회를 맡아 열심히 2년동안 사역을 하고 나니 처음의 200명 수준의 교인을 600명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2년 사이에 세배로 성장시켰다고 할까. 그래서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성장시켜려고 하는 데 갑자기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네가 하는 것은 마치 코카콜라 회사에서 판매고를 세배를 올려 그 수익을 자랑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또는 자동차 쎄일즈 맨이 판매고를 2년 전 보다 세배를 올려 즐거워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교회와 일반회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어떻게 그  성장 방법을 같은 식으로 하려는 것인가. 너는 영적으 로 성장해야 하고 또 네 교우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라고하는 것이엇다.

       오르티즈 목사님은 성령님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고 이런 질문에 대하여 심각하게 받아드리면서, “맞어,  교회와 일반 기업의 회사 운영방법은 같을 순 없지. 아니 근본적으로 회사와 교회으로 다른 것인데 어찌 목사님들은 교회의 성장을 일반 회사의 성장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은 교회의 일을 일단 몇주만 중단하고 기도원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고 오겠다고 말 한뒤 기도원으로 들어 갖다. 처음엔 모든 목회활동을 중단하면 큰일 날줄 알았다. 교회가 곧장 곤두박질하여 모두 잘못될 것으로 알고 도저히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나 계속 성령의 속삭임과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 갔을 때 마음의 평안을 얻어 수 주 동안 기도원에 들어가 성령님과 귀한 시간들을 보내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가 기도원에 들어가 성령님과 시간을 갖는 동안에 그분은 오르티즈 목사님에게, “너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구나. 너 뿐 아니라 너의 교회의 모든 교인들도 성장하지 않고 있는 거야. 숫자적으론 세배로 늘었다 해도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이 쪄서 비대해 졋을  뿐이지, 성장한 것은 아니야.” 그래서 목사님은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 교우들을 성장토록 도와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면서 다른 교회들을 보아도 모두 성장하는 교회라기 보다는 고아원에 모여있는 고아들 처럼 부모가 아닌 우유를 데워 그저 기계들 처럼 고아에게 겨우 우유들이나 데워 먹이는 직원같은 목회자들로 차 있는 회사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교회가  영원한 갓난아기들 처럼 고아원 에 모여 우유만 먹고 있는 성장치 않는 그냥 살만이 비대해 지는 그런 기관이 되선 않되겠고 다짐하게 되었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생각하며 어떻게 자라야 될것을 오르티즈 목사님이 지적하는 바를 읽으며 서로 배울 수 있기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자라지 않는 아이의 특징 첮째는, 기도가 천편일률적이다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변하여 성숙하게 됨으로  어릴때의 유치함을 버리게 된다. 신앙생활을 어지간이 했는데도  우리의 기도내용이 여전히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와 같다면, 즉 우리의 기도내용이 아직도 우리의 육신의 것만 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라지 않은 아이와 같다. 기도내용이 성숙해야 한다. 남을 위한 기도,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기도, 자신을 떠나는 기도가 있지못 하면 우리는 영원한 자리지 못하는 아이이다.

       두번채로, 주는 것 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은 항상 누구엔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줄줄 안다. 주는 것이야 말로 어른이라는 표시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남에게 줄줄을 모르면 이는 영원한 갓난아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보다는 은사에 더욱 관심이 많다는 것은 여전히 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온다. 아이들일 수록 신기한 구경을 좋아한다. 성숙한 사람들 만이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에 관심을 갖는다.

       아이들처럼 우리는 무엇이 값지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모른다. $100 짜리 지페와 사탕을 아이에게 주어 보라. 아이들은 백번이면 백번 모두 사탕을 고른다. 우리 역시 물질적인 것과의 선택 앞에 놓이면 아이들하고 똑 같이 행동한다.  영적인 것보다 언제나 근사한 집, 새차, 두툼한 은행구좌를 선택한다. 하나님 조차 물질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고자 한다. 하나님까지 설득하여 물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아직도 이기적인 어린아이들과 같다.

          세번채는, 자리지 않는 아이와 같은 신앙인이 모여있는 교회에는 항상 일꾼들이 없다는 것이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일꾼이,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일꾼이 부족하다.  10년 20년을 신앙생활을 한다해도 불신자를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들이 많지못한 것이다. 고작해야 그저 사람들을 교회로 무슨 행사때 데리고온 것이 고작이다. 사실 이것도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보다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며, 그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인도해야 한다. 고린도 전서 1:14-16 에서 보면 바울은 단지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만  침례를 주엇다고 했다.  그러면 누가 침례를 나머지 사람들에게 주었단 말인가? 그것은 바울은 또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한 뒤 침례나 교회의 중요한 일들은 그들이 맡아 보도록 한것이다.   

       우리는 자라나야 한다. 제자란 말의 뜻은 배우는 사람, 자라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그리스도의 품격을 닮아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 는  사람, 즉 제자로서의 삶이 자라나는 신자의 모습이다. 이 제자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사역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심을 명심하자. 제자의 핵심에는 Lordship이 확립된 이들이기도 하다. 우리 주님의 가치관이  우리의 가치관이 되어 순종의 삶이 우리 생활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Life-style 인 것이다.





왜 제자인가? Why Disciple?

20 08 2009

제자라는 말은 너무 우리귀에 익숙하여 그냥 스쳐 지나가기 쉬운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보면 쉽게 스쳐 지나가서는 안될 말이다. 제자, 제자의 삶, 또는 제자 삼는 일은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이 제자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또 제자의 삶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에서 핵심을 놓치는 중요한 우를 범하게 됨으로  다시 한번 제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인 마태복음 28장19-20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가 신앙의 근본을 가지고 고심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도의 중요성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전에 중점적으로 노력과 시간을 경주하신 것은 바로 막된 소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시 면서 한것은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남기고 갈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자들이 없었다면 오늘 날 교회가 생길 수도 그리고 지금 껏 존속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로 제자와 교회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날 교회의 목회자들은 과연 자신들이 제자인가 하는 명제에 부디치면 많은 회의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명제에 대하여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심도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를 섬김에 있어 많은 목회자들은 당장 어떻게 하면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크게 성장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지 신앙의 근본이나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또는  교회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 지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다. 좋은 설교자, 유능한 행정가, 잘 가르치는 교사, 또는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는 되려고 하지만 진실된 주님의 제자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기에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할 수도 있다. 

이번 기회에 이 명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기도하면서 예수님께 믿음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 큰 깨달음과 실천이 있어 큰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달라스의 한 침례교회 목사, Bob Roberts은 교회의 개척을 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계속 필자의 머리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교회개척은 두 가지를 잘 하면된다고 했다. 첮째는 예수운동(Jesus Movement) 이요, 두째는 지역사회 봉사다 라고 했다. 여기서 예수운동이란 바로 제자를 삼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를 삼는 일을 열심히 하면  제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제자들의 구룹이 조성되어 그들이 서로를 섬기게 되고 나아가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까지 섬기게 된다. 이러한 섬기는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면 이들이 자연히 모여 한 장소에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예배로 연결되어 결국 교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교회가 자연히 형성된다는 말은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세우 셨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성경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운다.”고하신 것을 주님이 세우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선 우리에게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고집스럽게 세우려고 만 하고 제자 삼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일이 거꾸로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제자를 삼을 것인가? 그것은 첯째로 우리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제자가 아닌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만들 수있겠는가 ?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으며 양이 양 새끼를 낳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은 항상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즉,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주님의 제자의 길에서 벗어나 있으면 않되는 것이다.

제자는 자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치고 어느 누구도 자발적으로 자신이 제자가 되겠다고 하여 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결 같이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여 한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낳으셨다. 우리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나서 그분은 만났고 그후 우리가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분이 우리를 먼저 발견하시고 우리에게 오시사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다. 그후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마음에 맞아드리게 하셨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분을 성실하게 따르도록하는 은혜를 주시사 다른 사람들은 혹 중도에 하차하고, 또는 다른 일이 바빠서 주님을  따르기를 중단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계속 은혜를 주시사 계속 주님을 따라가게 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분의 제자가 되게 한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계속 일하시사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게 하셨기에 우리들의 가치관이 세상사람들의 것과 달라 진것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결심으로 절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된것이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일하시에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에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제자 입니까?”란 책을 읽고 많이 제자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 책은 1900년대의 말기에 큰 쎈세이션을 일으켰었는데 다시 한번 손에 들고 읽으므로 새로웠었다. 앞으로 한 두번 본 칼럼을 통하여 나누어 볼 생각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나누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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